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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itut Schopenhauer de Pari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

    파리 쇼펜하우어 인문사회과학 연구소

 

 

- 쇼펜하우어의 예술의 세계

 

예술의 의미를 파악하고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로서, 이 분야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성인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일생 일대의 어려운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더군다나, 예술은 과학이나 철학과는 달리 실험이나 철학적 논리로서 표현될 수 없는 예술만의  논리적 특성을 가진 까닭에 그 표현이 더욱 더 어렵다 하겠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은 젊은 학생시절부터 지금껏, 예술을 자신들의 일생의 업으로 하면서도 예술의 궁극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종종 숨 막히는 답답함과 절망감을 느끼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은 나름대로 더욱 더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형성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은 대부분 방향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허무한 노력으로서, 사막의 신기루를 쫓는 거와 같다 하겠다. 예술은 그  의미파악이 무척이나 어렵듯이, 실제로 예술적 느낌, 경험을 갖는 것조차 역시, 매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인간의 감성능력을 갖고는 이러한 예술적 느낌,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겠다.(사실, 역으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의 역사이래로 끊임없이 추구되어 온 예술이지만 그 실체파악은 여전히 불가사이하다 할 수 있고, 신비롭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의미를 이해 못하면서, 또한 예술적 느낌, 경험조차 없으면서, 단지 개인의 느낌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시도하는 이런 식의 예술을 향한 노력은  부질없는 노력일 수뿐이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의 난해한 예술의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많은 사이비적인 부정적 실태를 보여주게 된다. , 예술은 그 실체가 불분명하고 그 의미파악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더 수 많은 왜곡된 의미부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결국,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예술의 정체성은 수 많은 왜곡된 거짓의 사이비 예술과 그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이러는 가운데, 사실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 구별이 어렵게 되었으며, 훌륭한 예술가와 진정한 예술작품의 가치는 일반인에게는 그저 혼돈과 위선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혼돈과 위선이, 어는 듯 예술의 실상이 되어 버린 오늘날의 예술세계에서,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함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실제로, 예술에 대한 정의는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많은 예술, 미학 이론가나 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을 설득할 만한 내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이렇듯 어려운 예술론은 사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감지, 표현할 수 있는 논리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감성, 또는 직관으로만이 이해가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결국, 예술의 세계는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의 세계와는 별도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모두 어렵기만 한 예술의 세계를 설명하여 주는 예술가나 철학자를 찾아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이 불가능하다 뿐이 할 수 없는 예술의 세계를 설명하여 주는, 유일무이한(?) 철학자를 찾을 수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독일의 19세기 초중반 독일 철학자인 « 아르트르 쇼펜하우어»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에서, 예술의 세계를 그의 철학세계를 빌어 명확히 설명해 주고 있으며, 예술 전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세계는 세계의 원동력이자 세계를 주지하는 « 대의지 »의 존재를 전제하는 그의 철학세계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자신의 인식능력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게 될 때 « 대의지 »가 주지하는 의지의 세계그리고 그에 속한 이념의 세계(즉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며, 결국에는 « 대의지 »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로써, 보통의 사람에게서는 단지 직관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으며, 또한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가운데서 겨우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소수의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이 들 중 일부가 바로 예술가들이다. 이러한 인간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해   있다.

먼저일부 소수의 인간들은 이러한 의지의 세계를 그 들의 남다른 이성적인 사고능력의 힘을 빌어 성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소수의 인간들은 자신의 뛰어난 사고능력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성찰함로써 그 속에 내재하는 의지의 힘을 인식하게 되며, 결국, 의지의 세계를 자신의 추론적 사고로 이해하게 된다.  소수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뛰어난 이성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이론적 이해와는 별도로 실질적으로 의지의 세계에 뛰어들어 활동함으로써, 몸으로 의지의 세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부의 인간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예술가와 성인(聖人)들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가와 성인은 곧 « 대의지 »의 산 증인이자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와 성인들의 의지의 세계에 대한 실천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들의 순수 인식능력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이러한 순수 인식능력은 그 들이 존재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순수관조(예술가의 경우)와 성찰(성인의 경우)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이 후 그들에게서 욕망의 세계는 점점 사라지게 되고 인식의 세계가 우선하게 된다. 여기서, 인식의 세계는 더욱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모든 욕망은 그들에게서 사라지고 순수한 인식만이 남게 되며, 결국 그 들의 인간으로서의 실체는 순수인식 주관으로서의 실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인식능력이 원래의 기능인 육체의 종속적 역할에서 순수인식 주관 자체로 변환될 때, 인간의 인식능력은 자신의 인식능력을 인식대상으로 하게 되는 것이며, 보통의 인간은 마침내 예술가와 성인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예술가는 플라톤의 이데아인 이념을 인식하게 되고그 인식한 이념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성인은 해탈의 세계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예술가는 이렇게 그들만의 순수 인식능력과 함께 탄생되는 것이며, 이러한 자신들만의 순수 인식능력으로 인식한, 일시적 사물이 아닌 영원히 존재하는 이념을 예술을 통하여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순수인식이고 또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 즉 이념이다. 그리고, 예술가의 역할은 이념을 인식하고, 이 인식한 이념을 그의 예술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게끔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표현하는 사람이 순수인식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고, 그리고 또한 관조한 대상의 이념을 인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두 가지 요소, 순수인식과 이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 두 요소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또한예술가가 예술행위를 할 때나, 또는 우리가 예술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기쁨은 이 두  가지 구성요소에서 비롯된다. , 구현되는 이념의 힘의 정도가 월등히 높으며 이념에서 비롯되고, 반면에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예술가나 예술품을 감상하는 자의 순수인식에서 비롯된다.

한편, 어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다 함은 우선적으로 더 아름다운 대상이 관조하는 사람에게 순수인식 상태로의 진행을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더 아름다운 존재라 함은 그 존재의 이념의 구현을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며, 이러한 이념 구현의 용이함은 그 관조 대상의 각 부분이 매우 명확하고, 세밀하여, 즉 이념을 순수하게 보여줄 수 있게끔 잘 정돈되어 꾸며진 그 형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다 함은 또한 더 아름다운 대상의 이념이 다른 사물의 이념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더 활성화되어 그 이념의 힘이 더 강함을 의미한다. 이렇듯, « 대의지 »에서 구현되는 이념의 힘은 자연력(중력, 화학력, 전기력 등)보다는 무기물이, 무기물보다는 식물이, 식물보다는 동물이, 그리고 동물보다는 인간의 이념에서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남으로써, 우리는 쉽게 동물보다는 인간에서, 식물보다는 동물에서, 무기물보다는 식물에서 그리고 자연력보다는 무기물에서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과 정체성을 본질로 하는 예술은 크게 조형예술(건축, 조소, 회화 등), 언어예술(소설, 희곡 ), 그리고 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조형예술 중 건축에서 우리는 이념의 최저단계인 자연력에서 나타나는 중량, 고정성 그리고 응집력 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력은 목조건물 보다 석조건물이 한층 명확히 보여주게 된다. 따라서, 목조건물보다 석조건물에서 우리는 건축예술의 미를 한층 더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 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건축 예술작품은 목조건물보다는 석조건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최하위 예술단계라 할 수 있는 건축예술이 타 예술과 다른 것은, 건축예술은 예술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념을 타 예술에서처럼 직,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고자 하는 이념에 종속된 사물을 명확히,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종속된 사물의 본질을 완벽히 표현함으로써 결국 감상자에게 관련된 이념의 파악을 쉽게 해 주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건축예술 외의 타 예술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에게서 인식될 수 있는 이념들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먼저, 식물에게서 표현되는 식물의 이념은 순수한 공간의 특성을 갖고, 동물의 이념은 공간의 특성 외에 운동성과 연관되어 시간의 특성을 갖게 되며, 끝으로 인간의 이념에서는 이 두 특성 외에 인간 개인의 행위, 태도 그리고 제스처 등으로 표현되는 성격의 특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식물을 예술의 대상으로 할 때는 순전히 공간에서 표현될  있는 아름다움 만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며, 동물을 예술의 대상으로 할 때는 공간과 시간에서 표현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인간을 예술대상으로 할 때는 공간, 시간에 표현되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간 성격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 이념들이 가지고 있는 미에 대한 특성을 고려할 때, 결국 조소예술(조각) 그 표현수단의 한계, 즉 색채의 결여와 표현의 한계(눈과 얼굴표정, 그리고 주위배경 표현의 어려움)로 인하여 주 표현대상은 운동성(움직임)의 특성을 가진 동물의 이념을 그 주 표현대상으로 하게 되는 것이며만약에 인간의 이념을 표현하고자 할 경우에는 인간의 운동성, 움직임에서 포착되는 인간모습의 우아함의 이념을 표현하는데 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소예술로서 인간 성격의 이념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이며, 표현된 작품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회화예술에서는 색채의 사용과 그 표현수단이 자유스로운 까닭에 공간과, 시간의 특성을 가진 아름다음은 물론 인간의 성격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회화예술에서는 자유자재의  회화 특유의 표현수단으로 공간과 시간을 넘어 인간성격의 이념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 성격의 이념은 색의 뛰어난 조화, 이미지의 적절하고 명확한 배열과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훌륭한 배치 등을 통하여, 예술가의 예술적 재능과 더불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회화예술 작품은 결국 감상자의 순수인식을 불러 일으키게 되어, 감상자는 작품 속에서 훌륭히 표현된 예술가가 추구한 이념을 미적 기쁨과 함께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예술 역시 회화예술과 마찬가지로 공간과 시간은 물론 인간의 성격의 아름다움까지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언어가 가진 특성을 그 표현수단으로 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 언어예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회화예술과는 달리 이념자체를 감상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언어가 의미하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전달하게 된다. 이렇게 전달된 추상적 개념을 감상자는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념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며, 이 후 발전된 이념을 자신의 순수인식 능력과 더불어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언어예술은 회화예술과는 달리 언어표현의 진행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성격의 이념 중에서도 낮은 수준의 이념이 아닌 좀 더 높은 수준의 이념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하겠다(1). , 인간의 자세나 얼굴 표정에서 보여줄 수 인간성격의 이념들, 예를 들면, 인간의 고통기쁨, 실망 등의 이념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회화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한 반면에, 더 높은 수준의 인간성격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정의감, 도덕심, 인류애 및 인간이념 중 최고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순수인식의 이념(해탈의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예술이, 아니 언어예술만이 그 표현이 가능한 예술이라 하겠다. 이러한 언어예술의 특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언어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시는 이러한 언어예술의 특성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데, 시는 시 언어들이 보여주는 개념들을 회화예술의 경우처럼 뛰어나게 조화시키고, 적절하고 명확하게 배열시키며, 그리고 훌륭하게 배치함으로써, 표현된 객관적인 개념을 감상자의 남다른 상상력으로 직관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순수인식능력과 더불어 마침내는 원하는 이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시 언어들의 이념으로의 변환은 마치 많은 여러 액체들이, 화학자에 의하여 화학작용을 거쳐 침전되면서 마침내는 침전물의 고체로 변모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다. 이렇게, 시인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이용하여, 많은 시 언어들의 보편적이고 추상적 개념들로부터 결국에는 직관적 이념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반면에, 소설에서의 개념에서 이념으로의 변환은, 시 언어들의 사용보다는 성격묘사 또는 성격의 전개, 관련상황의 진행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가능케 된다. , 소설이 예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에서처럼 감상자의 뛰어난 상상력이나 순수인식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데, 그 대신 소설가는 언어들의 조화와 배열과 배치가 아닌 일련의 내용전개, 즉 스토리를 전개하여 나감으로써 소설을 읽는 감상자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을 최종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용전개가 가능한 적절한 인간의 성격을 선정하여 정확하고 깊이있게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묘사된 성격을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하에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소설을 읽는 감상자는 소설가가 원하는 이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언어예술의 내용이 그 세부 장르를 불문하고 비극(悲劇)일 때, 즉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이 인류의 슬픈 운명, 고뇌에서 비롯되는 인생무상에 의한 절망감의 이념일 때, 우리는 비극을 예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성의 높낮이의 수준을 정의할 때는 예술성 강도, 즉 이념이 구현되는 힘이 그 기준이 되는 것이며, 이 경우 비극의 예술은 최고의 수준의 이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언급하였듯이, 자연력, 무기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이념 순으로 이념이 구현되는 힘이 강하여지며, 그리고 이러한 정도 차이가 예술성의 강도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 감상자는 예술성의 강도가 더 큰 이념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 즉 더 큰 미적 기쁨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인간의 이념은 또한 인간의 여러 성격의 이념들로 세분되는데 이들 인간성격의 이념들 중 역시 그 높낮이를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성격 중 낮은 수준의 이념은 인간이 동물에서처럼 욕망의 성격을 보여주는 성격인, 언급하였듯이, 고통, 기쁨, 실망, 이기심 등이 있으며, 반면에 인식의 성격을 보여주는 정의감, 도덕심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성격으로서 순수인식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성격의 이념 중 고통, 기쁨, 실망, 이기심 등의 이념을 표현대상으로 하는 예술보다 정의감, 도덕심, 그리고 결국에는 순수인식의 이념을 추구하는 예술이 예술성이 강한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성격 중 순수인식이 예술의 최고 이념이라 할 때, 비극의 예술은 비극적 내용을 전개함으로써 마침내 감상자에게 순수인식의 인간성격의 이념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비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생고뇌의 진리에서 비롯된다. 인생은 끝없는 욕망과 함께 고뇌인 까닭에 인간은 욕망의 세계에서 결국 비극적 삶을 살게 되는데, 이러한 수 많은 고뇌의 인생역정을 거친 인생은 마침내 우리에게 인생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실연을 하고, 사업실패를 하고, 주위 친지들의 죽음을 맞는 등의 갖은 인생고에 자신은 병마에 시달리기까지 하여, 마침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무상을 느끼며, 이와 함께  간의 모든 욕망은 씻은 듯 사라지고, 우리의 인식은 순수인식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극적 예술의 감상자는 이런 비극의 예술에서 자신도 역시 인생무상에 공감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순수인식이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비극의 예술은 예술의 최고봉으로써, 감상자에게 순수인식의 이념을 훌륭히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악의 경우에는 살펴본 타 예술과는 현격히 다른 특성을 보여주며 최고의 예술임을 자처하는데, 이는 음악이 조형예술(건축을 제외한)이나 언어예술의 경우처럼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 대의지 »에 속한 의지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대의지 »가 주지하는 의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의지들은 그들 자신들을 객관화시켜 표상의 세계, 즉 현 세계의 다양한 사물들을 가능케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의지의 최종적 객관화 이전의 단계가 의지의 이념화 단계인 것이다. 음악 이외의 타 예술은 한결같이 이러한 의지의 이념을 보여주고 전달하는데 충실한 반면, 음악은 이념을 뛰어넘어 의지 자체를 직접 현 세계에 재현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타 예술에서처럼 이념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의지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므로 그 효과는 훨씬 배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순수인식 상태에서 이념을 느끼는 미적 기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음악을 통하여 재현되는 의지에 의하여 감상자 인간의 의지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고, 감상자 의지자체가 변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이 실체에 대한 표현이라면, 타 예술은 이 실체의 그림자의 재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음악의 리듬과 선율에서 우리의 순수인식의 준비여부와 상관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강한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음악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작곡가가 담당하게 된다. 작곡가는 타고난 천부의 재능으로 각 음들간의 이상적 조화를 찾아내어 멜로디를 창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천재의 작업으로써, 개념을 통한 이성적 반성으로서가 아닌, 타고난 천부의 직관을 통하여 세계의 본질을 찾아내어 전시하는 것이다. 감상자는 이러한 훌륭한 음악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목욕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욕망의 찌든 때를 벗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은 이렇게 그의 철학세계의 일부로써, 예술세계를 그의 철학적 논리를 사용하여 명쾌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그의 예술세계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정 안할 수 없다 하겠다. 실제로, 그의 철학의 대 전제가 되는 « 대의지 », 그리고 이에 종속되는 의지 및 이념, 또한 이러한 것들의 존재와 현 세계의 연결 등에 관한 구체적 설명은 그의 철학세계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자체가 과학적 논리로 설명가능한 존재가 아닌 것일 때, 예술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이는 마치 신의 존재를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어쨌든, 예술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은 인류의 원시시대부터 과학문명의 정점에 와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하겠다. 왜냐하면,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과 수단의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끊임없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의 수 많은 인류를 대상으로 한 예술의 존재는 곧 예술의 마력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예술의 마력이 바로 예술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 A. Schopenhauer, Le monde comme volonté et comme représentation, trad. A. Burdeau, PUF, "Quadrige", 2006, Paris

- 쇼펜하우어(곽복록 역),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서문화사, 1992, 서울

 


(1) : 여기서 인간의 성격은 인간 개인의 구체적 성격이 아닌 인류의 특성으로서의 인간의 성격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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