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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itut Schopenhauer de Pari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

    파리 쇼펜하우어 인문사회과학 연구소

 

 

-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에 대한 분석과 평가

  ; 빅토르 위고(강명희 번역), 레 미제라블, ()하서출판사, 2009, 서울

 

    1862년에 프랑스에서 발표된 위고의« Les misérables », 본문에서 역자가 언급하였듯이, 작가 자신의 사상을 이상화한, 인도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파란만장한 서사시적 작품으로서,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세계적 문호의 걸작품을 비평하고자 함은, 두말 할 것 없이 무척이나 힘든 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위고의 걸작품 역시,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예술작품임이 확연할 때, 앞서 기술한 쇼펜하우어의 예술세계를 그 이론적 근거로 하여, 작품분석을 시도하여 보기로 하자.

 

I. 줄거리

    « Les misérables »은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 « Les misérables » 슬픈 인생이야기, 특히 주인공인 정발정(1)의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정발정은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된다.

그는 감옥을 나와 쉬지않고 나흘을 무작정 걷다, 밤이되어 어느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숙박하기 위해서 여관을 찾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가는 여관 마다 쫓겨나게 된다.

마을 교도소 , 그리고 가정집, 결국에는 개집에서 잘려다가 한테까지 쫓겨 나온다.

지치고 지친 정방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성당앞에서 우연히 만난 부인이 알려준대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얻기 위해 마을 성당의 주교관 문을 두드린다.

여기서, 정방정은 평생의 정신적 은인을 만나게 되며,  50살이 자신의  미천한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은인이 바로 지방에서 선행으로 평판이 자자한 미리엘 주교였다.

하지만,  정발정은 주교관서 따뜻한 식사와 포도주의 저녁 환대 , 그리고 19년만의 침대잠을 ,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게 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정방정은 헌병에게 잡혀, 다시 주교관으로 끌려오게 된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자신이 은식기를 선사한 것으로  헌병에게 말을 해주고, 또한 촛대까지 정발정에게 가져도 줌으로써, 정방정을 헌병에게 다시 풀려나게 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한다.

여기서, 정발정의 미천한 정신은 깊은 혼돈에 빠지게 되며, 주교의 성덕(聖德) 감동을 받게 된다. 결국, 이러한 혼돈과 감동 속에, 의도치 않게, 소년의 돈을  빼앗게 됨으로써, 찢어질 듯한 가슴으로 울부짓으며,  정발정은 19 만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 정발정은 시골마을에 마들렌씨라는 가명으로 정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얼마 안되는 돈과 신부가 은식기를 팔은 돈으로, 지방에서 새로운 흑옥 세공사업을 일으켜, 지방 유지가 되고, 또한 다른 훌륭한 선행으로 지방의 시장으로까지 임명되게 된다. 

여기서, 정발정은 과거 자신에게 평생의 은혜를 베푼, 미리엘 주교에게 보은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 평생의 친딸같이, 자신의 운명같이 생각하면서 헌신하였던 꼬제트의 친엄마인 훵띤느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훵띤느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꼬제뜨를 위탁한 사악한 여관주인인 떼나르디에씨 부부에게,  과다한 양육비를 힘들게 보내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인이었다.

한편, 이러한 훵띤느는 정발정이 주인인  흑옥 세공공장에서 일을 하다 공장책임자의 오해로  쫒겨나게 되며, 결국은 딸의 양육비로 인하여 창녀 생활까지 하다  병들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정발정은 책임을 느끼게 되며, 훵띤느를 마지막 임종까지 정성껏 돌보게 된다. 결국, 정발정은 갖은 노력으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꼬제뜨를 되찾고, 꼬제뜨의 아버지이자 평생의 보호자로서의 헌신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정발정의 이러한 헌신적 삶은, 과거 출옥 직후 범하게 의도치 않은 작은 범죄행위로 인하여, 어쩔 없이 시장직도 버리고, 죄인으로서, 평생을 자베르 형사에 쫓기는 도피의  삶이 되어버린다.

 

          마침내, 정발정은 죽을 고비를 없이 넘긴 후에 , 감옥에 다시 수감되고, 그리고 다시 탈옥하여 꼬제트를 되찾고, 그리고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파리생활 후에,  이후 년가 비교적 안정된 수도원 생활을 꼬제뜨와 함께 보내고,  이제는 파리에 정착하여 둘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와 딸은 파리 시내의 룩성부으 공원을 팔짱을 끼고 산책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부녀의 이러한 행복한 삶은, 마리우스라는 청년이 나타나  꼬제트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됨으로써, 다시 동요케 된다.  마리우스는  법률학교를 나와 변호사가 , 하지만 꽤나 가난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가난은 부르주아지 출신의 외할아버지와의 반목에서 시작되었다.

마리우스 아버지는 나폴레옹 시대의 장교출신으로서, 무척이나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자식에 대한 사랑은 왕정복고 , 자신의 아내가 죽고나서 오직 유일한 그의 기쁨이었다.

반면에, 완고하고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원치 않았던 할아버지는 딸이 죽자, 상속을 핑게 삼아, 어린 마리우스를 아버지에게 빼앗아 자신의 보호하에 두게 된다.

결국, 성인이 되어조국과 자신을 사랑한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한 마리우스는,  고집장이 할아버지와는 달리 완전한 혁명파요 진정한 민주주의자요 또한 공화파가 되었다.

이렇게, 외할아버지와의 반목으로, 이상 할아버지의 금전적 도움을 마다하고, 과거에는 가난한 법률학교 학생이었으며, 이제는 가난한 변호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마리우스와 꼬제트 사이에는 운명적 사랑이 싹트게 된다.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나 눈길을 주고 받은 젊은, 매혹적인 청년과 처녀는, 누가 먼저라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매료되어 사랑하는 사이가 것이다.

이러한 마리우스와 꼬제뜨의 사랑과 행복은 사실, 정발정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소년시절, 마리우스 아버지가 자신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아들을 떠나 보내야 했듯이, 정발정 역시, 자신의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사랑하고 헌신하였던, 예쁘디 예쁜 자신의 딸을 떠나보내야 시간을 맞이하게 것이었다.

정발정은 고민하게 된다.  자신의 불행이냐, 딸의 행복이냐 ?  이러한 고민은 사실 둘이 숨어 살었던 몇년간의 행복한 수도원 시절에도 했었던 같은 고민이었다. 자신은 수도원의 잡일을 하며,  수녀가 딸을 지켜보면서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에게는 딸과 함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지극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결국, 정발정은 결심한다.  다시 자신의 둘도 없는 딸은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로.

이렇게, 늙은 정발정은 국민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무장을 한채,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던지게 된다.

마침내, 정발정은 총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천운으로 구해내어, 마리우스 외할아버지에게 보내준다. 오랜 치료 , 위독했던 마리우스가 살어나자, 할아버지는 안도의 기쁨과 함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결국에는 반대하였던 꼬제뜨와의 결혼을 승락하게 된다.

                                                                                                               

      이제, 정발정에게는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정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선, 딸의 결혼식을 위하여 무척이나 많은 지참금을 지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결혼식에는 손의 부상을 핑계로 필요로 하는 결혼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피로연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제 사위인 마리우스에게, 범죄자로서 가명으로 숨어 살었던, 꼬제뜨도 몰랐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이러한 충격적 사실에 매우 놀라면서도,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떠날려 하는 정발장을 만류하여 보지만, 정발정은 가끔 딸을 보러올 있기만을 부탁하면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정발정은 딸을 보러오던 뜸하던 발길도 끊고, 결국 앓아눕게 된다.

이후, 마리우스는 우연한 기회에 총상으로 죽을 뻔했던 자신을 구하여 주었던 사람이 바로 정발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발정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기 위하여 꼬제뜨와 정방정의 거처로 황급히 달려가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발정은 사람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마지막 숨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온 꼬제뜨를 보자 정발정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을 있게 하여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지 않았냐는 마리우스의 외침에, 겸손스럽게 자신은 단지 모든 사람들에게 방해될 것을 염려해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마침내, 죽음을 앞둔 장발정은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며, 단지 탁자위의 십자가상을 가리키며, 이분이야 말로 위대한 순교자라고 힘을 주어 말한다. 그리고, 너희들을 가장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벽난로 위의 두개의 촛대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을 잇는다.  촛대는 바로 과거 자신이 미천했을 당시 미리엘 주교가 자신에게 선사하였던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황금이나 다이아몬드, 아니 세상의 무엇보다도 값진 것이었던 것이다.  미천했지만, 이제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 범죄자 정발정은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II. 글의 주제

          앞서의 쇼펜하우어의 예술세계에서 언급하였듯이, 문학작품이 예술성을 추구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모든 글이 그렇듯이 속에서는 작가가 표현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글의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글을 읽음에 있어서, 속에 담겨있는 주제를 파악하는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결국, 작가가 문학작품을 저술함에 있어 관건은 얼마나 중요성있는 주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예술성 있게 표현하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 Les misérables » 주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살펴 있겠다.

 

          우선적으로, « Les misérables »  전체의 흐름에서, 처음부터 부분까지에서 나타듯이, 선과 악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동시에 대조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글의 주제는 이기심, 비양심, 불의, 그리고 악에 비교되는 양심, 정의, , 그리고 선을 기리는  예찬의 글이라 하겠다.

실제로, 인간의 이러한  사악한, 또는 훌륭한 성격과 행위에 대한 구체적 기술을 본문에서 살펴볼 있는데, 먼저 미리엘 주교와 정발정의 만남에서 나타나고 있다.

선행으로 평판이 자자한 미리엘 주교는,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받아주지 않았던, 감옥에서 출감한  험악한 모습의 정발정에게, 마치 귀한 손님처럼 식사대접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반면에, 이러한 주교의 친절함과 선행에도 불구하고, 정발정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다. 그러나,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잡혀온 정발정을,  오히려 주교는 은식기는 자신이 원해서 주었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은촛대까지 더불어 주어버린다.

한편, 사악함의 대표적인 예로서는떼나르디에씨 부부를 있는데, 양육비를 받고 위탁받은 어린 꼬제뜨를,  한겨울에 말에게 먹일 물을 길어오게 하는 , 여관일로 혹사시키며 사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또한, 후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던 정발정을 함정에 빠트리고, 돈을 빼앗기 위하여, 꼬제뜨를 인질로 하기 위한 위협과 무서운 폭력을 가하게 된다.

마침내, 훌륭한 성격과 행위는, 정발정이 꼬제뜨가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내고, 자신은 자베르 형사에게 잡혀가는 대목에서 한층 절정에 이르는게 된다.

끝내, 정발정은 이들 둘만의 행복을 위하여, 방해되지 않게 자신의 거처에서 칩거하게 되며, 이후 병을 얻어 임종을 맞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임종을 슬퍼하는 꼬제뜨와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며,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위대한 순교라 한다. 

결국, 이렇게, 성인이라 있는 미리엘 주교에서 시작된 지극한 덕과 선은, 꼬제뜨와 마리우스의 행복을 빌며, 예수님의 순교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정발정의 미리엘 주교에 대한 보은으로서의 덕과 선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 Les misérables » 소설 전반에서, 선과 악에 대한 극단적이고 대조적인 묘사를 확인할 있었다.  그리고,  미천했던 정발정이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성격과 행위를, 갖추고 행하게 되는 변화과정를 살펴볼 있었다.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묘사되었듯이, 미천하기만 했던 정발정의 성격은, 이제 자신의 죽음은 아랑곳 하지않고, 타인의 불행과 죽음,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와 정도의 덕과 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정발정의 성격의 변화를 통하여, 결국 작가는 소설이, 이기심, 비양심, 불의 그리고 악에  비교되는 양심, 정의, , 그리고 선을 예찬함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이러한 덕과 등의 덕목들은, 인간이 역사 이래 인간이 갖추어야 최고의 덕목으로 평가된다 있으며, 또한 이러한 덕목들은 사실 인간의 최상급의 성격으로서, 예술에 있어 최고 수준에 이르는 이데아로서의 예술대상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매우 중요성 있는 인간 덕목으로서의 덕과 선을 예찬함으로써, 소설은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III. 분석과 평가

          앞서의 이론적 근거, 쇼펜하우어의 예술세계를 바탕으로, 우리는 « 작가가 문학작품을 저술함에 있어 관건은 얼마나 중요성있는 주제를  어떻게, 얼마나 예술성 있게 표현하냐가 되는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우리의 분석과 평가도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파악한 소설의 주제에 관하여 논하여 보기로 하자.

앞서 파악한 주제를 양심, 정의, 특히 덕과 선에 대한 예찬이라 , 이러한 덕목들이 인류역사 이래 대대로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취급되어 왔고, 또한 , 서양을 막론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덕목을 진리추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것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성은 결국, 인간에게 개념을 갖을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생각함으로써, 동물적인 본능적 이기심의 성격에서 인간적인, 이성적인 성격으로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생각한 결과로서,   사색의 결과로서, 인간은 마침내 자신이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생물체, 또한 많은 인간 중에 단지 개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타인이 다른 바가 없는 동격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 후에는,  인간은 남에게 해를 주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  타당성 없는 근거없는, 단지 동물적 본능에서 근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개인의 이기심에서, 일말의 의미도 발견할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동물적 이기심에 대한 무의미는, 우선적으로 인간 개인에게 정의로운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하겠다. 여기서, 정의로운 성격은, 타인에게 손해도 주지 않고, 반면에 이익도 주지 않는 상태의 성격을 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타인이 동격이기 때문에, 자신과 개체는 평등한 관계임으로, 원칙적으로 손해도 이익도 오고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색이 심화되고 발전됨에 따라, 인간 자신은 자신이 개체로서 더욱 자신의  미미한 존재를임을 깨닫게 된다. , 자신은 하나인데 타인은 없이 많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인류 전체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타인은 이상 동격이 아니게 되며, 오히려 타인이 우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은 손해를 있는 것이며, 나아가 희생도 하여야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침내, 이러한 사색 끝에, 반성과 숙고 끝에, 인간의 정의로운 성격은 덕과 선을 겸비한, 인간의 갖출 있는 최상급의 성격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동물적 이기심이 역으로 발전할 , 인간의 이성이, 사색능력이 인간의 미미한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 인간의 이기심은 동물의 이기심에서  더욱 악화, 발전하게 되며, 결국에는 타인에 대한 사악한 이기심으로 변화되어, 인간 자신은 사악한 성격을 갖게 된다 하겠다. 이렇게, 사악한 성격의 인간은 동물의 본능적 이기심을 넘어서는, 필요 이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악한 성격에 비하여, 인간의 정의롭고, 덕과 선의 성격이 인간의 중요한 덕목으로, 진리추구의 대상으로 인류역사 이래 대대로 인정받고 이유는 무엇일까 ?

한마디로, 인류의 종족보존과 발전을 위한 조물주의 배려라고 생각하여야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에 의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은 결국에는 인류의 재난이라 있는 것이며, 반대로 성인같은 선자에 의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희생은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조물주의 이러한 배려에서, 인간은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는 많은 선과 악의 대결에서 악을 물리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인류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희생하였던,  많은 인류의 정의로운 영웅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중요성있는 덕과 선에 대한 예찬으로서의 소설의 주제는 명약관화(明若觀火)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소설이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예술성을 병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쇼펜하우어의 예술세계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성격은 예술의 최상급의 궁극적 대상으로서의 이념, 이데아에 해당된다. 이러한 예술이 추구하는 이념은 « 자연력, 무기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이념 순으로 이념이 구현되는 힘이 강하여지며, 그리고 이러한 정도 차이가 예술성의 강도 차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 감상자는 예술성의 강도가 더 큰 이념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 즉 더 큰 미적 기쁨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인간의 이념은 또한 인간의 여러 성격의 이념들로 세분되는데 이들 인간성격의 이념들 중 역시 그 높낮이를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성격 중 낮은 수준의 이념은 인간이 동물에서처럼 욕망의 성격을 보여주는 성격인, 언급하였듯이, 고통, 기쁨, 실망, 이기심 등이 있으며, 반면에 인식의 성격을 보여주는 정의감, 도덕심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성격으로서 순수인식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성격의 이념 중 고통, 기쁨, 실망, 이기심 등의 이념을 표현대상으로 하는 예술보다 정의감, 도덕심, 그리고 결국에는 순수인식의 이념을 추구하는 예술이 예술성이 강한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

반면에, « 소설가는 일련의 내용전개, 즉 스토리를 전개하여 나감으로써 소설을 읽는 감상자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을 최종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용전개가 가능한 적절한 인간의 성격을 선정하여 정확하고 깊이있게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묘사된 성격을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하에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소설을 읽는 감상자는 소설가가 원하는 이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성격 최고 수준의 예술대상이라   있는 덕과 선의 성격을 사악한 성격과 비교하여 극단적이고 대조적으로, 소설 전반에 걸쳐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있다.

우선, 덕과 선의 표본으로서의, 성인(聖人)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있는 미리엘 주교의 성격은 감옥에서 나와 미천하기만 했던 정발정을 대하는 모습, 그리고 정발정이 은식기를 도둑질한 사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리엘 주교는, 감옥에서 부터 나흘을 쉬지않고 걸어 지치고 지친 정발정을, 전과자인데다 험악한 생김새로 인하여 숙박을 거절당하고, 마을의 여관과 가정집에서, 마침내 개집에서 개한테까지 쫓겨나 오갈데 없는 그를 친절히 귀한 손님처럼 맞아주게 된다.

그러나, 정발정은 오히려 밤중에 주교의 침실에 칩입하여 은식기를 훔치려다 자는 주교의 잠든 모습에서, 성스러운 모습에서 충격적인 감동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이 본문에서 다음(P 54) 같이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 그는 어둠 속에 있었다. 칸델라를 손에 , 빛나는 주교의 모습에 놀라 넋을 잃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런 모습을 적이 없었다. 신뢰에 가득 모습이 그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그의 마음에 이러난 감화는 아무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리라. 아마 자기 자신조차도. 분명한 것은 그가 감동하고 압도 당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의 눈은 주교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태도와 얼굴에 뚜렷이 나타난 것은 가지 망설임 뿐이었다. 마치 두개의 심연, 일신을 파멸시킬 심연과 거기에서 구원될 있는 심연의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같았다. 머리를 박살내거나, 아니면 손에 입을 맞추거나 하나를 택할 생각인 같았다. 잠시 그의 왼팔이 천천히 이마로 올가갔다. 그러고는 모자를 벗더니 팔을 다시 천천히 내렸다. 발장은 다시 주교를 골똘히 내려다 보기 시작했다.  왼손에 모자를, 오른 손에 막대를 들고, 험상궂은 얼굴 위로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 »

이러한 미리엘 주교의지극한 덕과 선으로서의 성격은, 주교의 지극한 친절에도 불구하고 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붙잡혀온 정발정을,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한 것이라 하고, 아울러  은촛대도 줌으로써, 헌병에게 풀려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친절과 관용끝에, 미리엘 주교는 정발정에게, 다음(P 59, P 60) 같이 어둡기만 했던 그의 인생에 광명을 선사하고자 한다.

« 주교는 그에게 다가가 나직한 음성으로로 말했다. ‘‘ 잊지 마시오. 결코 잊어서는 되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식기를 쓰겠다고 내게 약속한 일을 ’’

아무것도 약속한 기억이 없는 발장은 그저 어리둥절했다. 주교는 힘을 주어 말을 했다. 그는 엄숙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 발장, 나의 형제여 !  당신은 이제 악과는 인연이 착한 사람이오. 당신의 영혼을 위해 내가 값을 치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암담한 생각과 절망에서 구출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것이오 ’’ »

위의 번째 예문에서, 미리엘 주교의 잠든 모습에서 나타나는 성스러운 모습은, 결국 주교의 선과 덕의 성격이 자신의 육체와 혼연일체가 되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오히려 충분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타남을 의미한다 하겠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잠자는 얘기의 얼굴에서 지순(至純)미를 자연스럽게 느낄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스러운 모습으로서의 주교의 덕과 선의 성격은, 오랜 감옥생활로 미천하기만 했던 정발정에게 충격적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이며, 마침내 그를 해치려했던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특히나,  끝부분에서 표현되었듯이, 정발정이 손에는 무기로서의 막대, 칸델라를, 손에는 경의의 표시로 모자를 모습에서, 독자들은 정발정이 받은 충격적 감동과 더불어 미리엘 주교의 성스럽기까지한 성격을 충분히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번째 예문에서, 미리엘 주교는 미천하고 어둡기만 했던 정발정의 인생에 광명을 선사하고자, 정직하고 착한 인생의 약속을 강요하고 다짐받는다. 여기서, 주교의 성스로운 모습과 엄숙한 말투를 글의 적절한 표현으로우리는 독자들은 충분히 상상할 있으며, 특히나 « 당신의 영혼을 위해 내가 값을 치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암담한 생각과 절망에서 구출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것이오 »라는 표현에서 정발정 인생이 정신적 광명을 받고 변화될 것을 의심치 않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 , 정발정의 변화된 심경이 다음(P 65) 같이 표현되고 있다.

« 갑자기 자기 발에 힘이 빠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덮치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얼굴을 무릅 사이에 파묻은 큼직한 위에 쓰러지며 외쳤다. ‘‘ 아아, 나는 미제라블(불쌍한  사람)이다 ! ’’ 그러자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그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19 동안 그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여기서, 또한 독자는 정발정의 지금의 괴로움과 함께, 앞으로 새롭게 다가올 환희에 인생, 덕과선으로서의 인생를 충분히 감동적으로 짐작할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 ‘‘ 아아, 나는 미제라블(불쌍한  사람)이다 ! ’’ 그러자  그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그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19 동안 그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라는 표현에서 독자는 정발정의 극적인 심경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 광명을 얻은 정발정은 세월이 흐른 , 이상  과거의 미천하기만, 미제라블하기만 했던 정발정이 아닌 덕과 선의 성격을 지닌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로서의 정신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정발정의 달라진, 미리엘 주교에 대한 보은으로서의 덕과 선의 성격은, 소설의 초반부 표현되고 있다.

반면에, 작가는 이러한 정발정의 성격에 대조적으로 떼나르디에의 사악학 성격을 다음(P 65) 같이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누가 목덜미를 잡는 같았다. 그는 돌아 보았다. 그것은 아까 퍼져 있던 손이 오므라지면서 그의 외투자락을 잡은 것이었다. 보통 사람같으면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나이는 웃었다. ‘‘ 나는 뭐라고.  이것은 송장이 아닌가. 헌병보다는 송장이 낫지.’’ 사이에 손은 힘이 빠지면서 그를 놓았다.  무덤 안에서는 인간의 노력도 다해 버리는 법이다

여기서, 작가는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의 몸을 뒤져 금품까지 훔치는 추악한 행태의 , 사악하기 이를데 없는떼나르디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특히, « 그러나 사나이는 웃었다. ‘‘ 나는 뭐라고.  이것은 송장이 아닌가. 헌병보다는 송장이 낫지.’’ »라는 표현에서,  독자는 떼나르디에라는 인간의,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는 극도의 사악함을 전신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떼나르디에의 사악한 성격을 소설에서 극적으로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친절과 선행을 베풀고자 정발정을, 다른 악당들과 함께 간계로서 함정에 빠트리고, 돈을 목적으로 인질로 삼고  폭력을 가하는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무리의 간계와 폭력 앞에, 정발정의 자신의 지극한 덕과 선의 성격은 더욱 돋보이게 된다.

실제로, 정발정이 사악한 악당들에게 잡혀을 , 꼬제뜨를 보호하기 위하여 악당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은, 장엄하도록 아름다운 그의 눈을 통해 다음(P 325, P 326)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 살이 타는 소리가 들리고, 고문실에서나 나는 독특한 냄새가 가득 펴졌다. 마리우스는 공포에 질려 비틀거렸고, 악당들까지도 몸서리를 쳤다. 르블랑씨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가 살을 태우는 동안 그는 태연하게, 그리고 장엄하도록 아름다운 눈으로 테나르디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의 그림자가 없었고, 완전히 승화된 고통 속에 엄숙한 위엄만이 떠돌고 있었다. 위대하고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가 육체적인 고통을 견딜 때는, 영혼이 외부에 나타나고 고귀한 성품이 이미 위에 역력히 드러나는 법이다. »

앞서의 미리엘 주교의 잠자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성스러운 모습은 무의식적인 지순한 덕과 선의 성격을 보여주는데 반하여, 여기서의 정발정의 덕과선의 성격은 육체의 고통을 초월한, 육체와 분리되는 해탈의 의미에서의 덕과 선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결국, 여기서 정발정은 육체의 고통은 물론이고, 원수를 사랑할 있는 지극한 덕과 선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바로 « 장엄하도록 아름다운   », 정발정의 눈을 통하여 정수(精髓) 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렇게 고귀한 성품과 영혼을 소유하게 정발정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친절과 선행을, 이번에는 자신이 마찬가지로 타인들에게 베풀게 되는데, 특히나 가엾게도 병들고 창녀가 되어버린, 꼬제뜨의 엄마인 훵띤느에게, 지극한 연민을 갖고 자신이 미리엘 주교로부터 찾았던 광명을 다음(P 113, P 114) 같이 나누어 주고자 한다.

« 자베르가 나가자 마들렌은 여자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진실한 사람처럼 천천히 말했다.  ‘‘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소. 당신이 말한 그런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당신이 우리 공장을 그만둔 것조차도 나는 모르고 있어소. 나한테 와서 말하지 않았소 ? 아무튼 지나간 일은 어쩔 업소고, 당신의 빛은 내가 갚아 드리지요. 아이도 데려오도록 합시다. 아니면 당신잉 아이한테  가도 좋소. 여기든 파리든 당신이 좋아하는 곳에 가서 살아도 좋소. 필요한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당신도 행복해지면 다시 진실힌 사람이 것이오. 뿐만 아니라, 들으시오. 당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도 그러리라 믿지만, 당신은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아직고 순결하고 깨끗하오. 아아, 당신은 가엾은 여자요 ! ’’ »

여기서, 우리는 병들고 가엾는 여자에 대한 정발정의 애타는 연민의 정을 확연히 수가 있다 하겠다. 이러한 애탄 연민에서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정발정은 그의 고귀한 성품에서 나오는 진실된 배려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애탄 정발정의 진실된 마음은 «  당신은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아직고 순결하고 깨끗하오. 아아, 당신은 가엾은 여자요 !  »라는 감동적 표현에서, 독자는 여실히 느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훵띤느와의 만남에서, 자신이 보호자이고 아버지가 어린 꼬제뜨와의 평생의 인연이 시작되고, 어린 꼬제뜨는 이제 그에게는 미리엘 주교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에게는 꼬제뜨는 바로 사랑의 광명이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꼬제뜨에 대한 사랑이, 본문에서는 다음(P 199) 같이 미리엘 주교에서 받은 광명과 비교되는, 사랑의 광명으로 표현되고 있다.

« 그의 영혼 속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들어와 있었다. 발장은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해 적이 없었다. 25년동안 그는 세상에서 완전히 자기 혼자였다. 번도 아버지나 애인, 남편, 친구였던 적이 없었다.

그는 코제트를 발견하고 코제트를 구출하여 데리고 왔을 , 자기의 오장육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모든 정열과 애정이 아이를 향해 돌진했다.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이처럼 신선하고 측은 마음이 수가 !

다만, 그는 55세나 되었고 코제트는 여덟 살이었기 때문에, 그가 생에에 걸쳐 품게 모든 사랑은 일종의 말할 없는 광명 속에 녹아 들어 버렸다. 그것은 그가 만난 번째 광명이었다. 밀리에르 주교가 그의 지평선에 ()이라는 여명을 던져 주었다면, 코제트는 사랑의 여명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이제, 고귀한 성품과 영혼, 그리고 부까지 소유하게 정발정은 지방의 시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행을 베풀며 살게 되는데, 이러한 정발정의 덕과 선으로서의 성격은 마침내 꼬제뜨를 향한 사랑의 광명 속에 녹아 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꼬제뜨를 향한 사랑은,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아닌, 정발정의 덕과 선의 성격이 집약된 고귀한 정신의 승화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정발정의 이러한 승화된 사랑은 꼬제뜨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사랑 자신의 삶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발정의 사랑은, 위의 예문에서 처럼, « 나이가 들었으면서도 이처럼 신선하고 측은 마음이 수가 ! », 그리고 « 그가 생에에 걸쳐 품게 모든 사랑은 일종의 말할 없는 광명 속에 녹아 들어 버렸다. » 표현으로, 감동적으로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소설 전반에서 흐르는 덕과 선의 인간 성격에 대한 예찬을 위한 상기의 표현구절 외에, 역시 독자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작가가 독자에게 원하는 이념을 적절한 상황묘사로서 파악케 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살펴 있겠다.

먼저, 어린 꼬제뜨가 사악한 떼나르디에씨 부부에게 여관일, 물긷는 일로, 혹사당하는 표현의 구절(P 171)인데,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너무나 생생하게 가엾은 꼬제뜨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 이렇게 하여 걸음 걸었으나 통은 물이 가득 들어 있어 굉장히 무거웠다. 그래서 물통을 내려놓지 않을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물통을  들었다. 이번에는 좀더 오래 걸었다. 그러나 다시 멈추지 않으며 되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노파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걸었다. 물통의 무게로 연약한 팔이 당겨져 뻣뻣해졌다. 쇠로  손잡이는 마침내 젖은 손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코제트는 자주 물통을 내려놓고 쉬지 않으면 되었다. 멈춰 때마다 차가운 물이 통에서 흘러 넘쳐 맨발을 적셨다. 이것은 겨울 ,  속의 인적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코제트는 겨우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다. »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느낄 있게 된다.

, 소설가는 « 내용전개가 가능한 적절한 인간의 성격을 선정하여 정확하고 깊이있게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묘사된 성격을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 하에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소설을 읽는 감상자는 소설가가 원하는 이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

부연하면, 이 책의 저자는 독자에게, 이 부분의 묘사에서 종달새 같이 발랄하기만 했던 꼬제뜨의 가엾은, 애처로운 삶을, «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 하에 보여줌으로써 », 안타까우리 만큼 힘든 어린 인생, 삶의 이념을 파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특히나 « 그리고 코제트는 겨우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다. »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절정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하나의 의미심장한 상황묘사는, 젊은 마리우스의 의식 변화를 묘사하는 부분인데, 다음(P 252, P 253) 같은 구절에서 독자는혁명의 의미를 불현듯 깨닫게 되는한 젊은이의 정열에 가득찬 마음을 확연히 읽을 있게 된다 하겟다 .

« 그는 가슴인 뭉클해졌다. 몸은 미친 떨렸고, 숨이 차고 자기 자신마져도 잊었다. 문득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양팔을 밖으로 뻗치고, 어둠과 침묵과 캄캄한 무한과 영원한 공간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소리쳤다. ‘‘ 황제폐하 만세 ! ’’ 

이미 놀라운 걸음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군주제의 몰락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프랑스의 부흥으로 보였다. 그의 진로는 바뀌어 있었다. 일몰인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일출이었던 것이다. »

여기서, 독자는 젊음, 청춘에게 다가온, 갑자스러운 깨달움에서 비롯되는 지극한 정열과 애착의 심경을 느낄 있게 되는데, 특히 «  ‘‘ 황제폐하 만세 ! ’’  »라는 표현에서 독자는 절정의 공감을 느낄 있으며,  또한 « 일몰인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일출이었던 것이다. » 라는 구절의 대조적 묘사에서는 반증적인 진리가 가져다 있는 대단원적인 신선한 공감을 느끼게 된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독자에게 또한 공감과 감동을 주는 표현을 다음(P 444) 같이 발견 있겠다.

«  결렬한 상태라는 것이 있다면, 자베르가 바로 그러했다. 거기서 빠져 나올 있는 길은 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는 결연히 발장과 맞서 죄수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고, 하나는….

자베르는 몸을 굽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분간할 없었다. 철석거리는 물소리는 들렸으나 흐름은 보이지 않았다. »

여기서는, 자베르 형사의 결코 양보를 모르는 외골 수의,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정의로운 성격을 느낄 있다 하겠다. 자베를 형사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정발정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자신이, 결국 그에게는 은인이자 이제 도덕적으로 성인에 가까운 그를, 죄인으로 체포하여 감옥에 보내야 하냐, 마냐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평생을 정의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의무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마침내 자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만의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예문에서, 이러한 고민으로 인한 자살 선택의 표현은 « 모든 것이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분간할 없었다. 철석거리는 물소리는 들렸으나 흐름은 보이지 않았다. »라는 구절에서, 의미심장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나,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는 자베르 형사의 의도가,  독자에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소리만 들리지 보이지 않는 강물의 흐름을 연상케 하며, 무섭도록 명확히 전달되고 있다 하겠다.

 

          언급하였듯이, 소설  « Les misérables » 선과 악에 관련하여 여러 등장인물들의 대조적인 성격을 구체적이고 극단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마침내 덕과 선에 대한 예찬을 주제로 하여 대단원을 내리는 스토리의 소설이라 하겠다.

이렇게, 덕과 선이라 인간의 성격에 대한 예찬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작가는 주인공으로 무식하고 미천한 정발정을 등장시켜, 결국에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덕과 선의 성격을 갖춘 정발정의 모습, 그의 성격의 변화과정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작가는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데, 먼저 덕과 선의 표본이라 있는 미리엘 주교를 등장시켜, 정발정의 성격변화를 예고하게 되며, 그리고 이러한 덕과 선에 대조적이고 갈등의 관계로 떼나르디에씨 부부와 자베를 형사를 등장시켜, 의미심장한 상황으로 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감으로써, 정발정의 변화된, 지극한 덕과 선의 성격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자 하였다.

한편, 또한 작가는 꼬제뜨를 등장시킨으로써, 정발정의 이러한 덕과선의 성격이, 이제 딸에 대한 일종의 광명과도 같은 사랑으로, 마침내 집약되고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작가는 딸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정발정의 모습을 부각시키며, 여러 위기상황을 전개시켜 나가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정발정의 지극지순한 딸에 대한 사랑은 정발정에게 자기 희생을 요구하게 되며, 끝내  정발정은 딸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하여 자신은 조용히 혼자 칩거하게 되고, 급기야는  병상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이렇게, 언급하였듯이, « 미천기만 했던 정발정의 성격은 이제 자신의 죽음은 아랑곳 하지않고, 타인의 불행과 죽음,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와 정도의 덕과 선을 보여주게  »으로써, 소설의 덕과 선에 대한 예찬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소설 전반에서 우리가 느끼듯이, 그리고 위의 여러 예문에서 분석, 확인하였듯이, 소설 « Les misérables » 작가는, « 소설가는 일련의 내용전개, 즉 스토리를 전개하여 나감으로써,  소설을 읽는 감상자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을 최종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용전개가 가능한 적절한 인간의 성격을 선정하여 정확하고 깊이있게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묘사된 성격을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하에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소설을 읽는 감상자는 소설가가 원하는 이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라는 소설가 본연의 임무를 다 하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겠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딸의 행복을 위한 정발정 자신이 선택한 최후의 희생과 죽음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며,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순교에 버금가는 덕과 선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렇게, 이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의미심장한 상황과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독자는 이 소설에서 덕과 선의 이념을 충분히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국하고, 이 소설에서 우리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볼 수 있겠다.

, 독자의 공감을 위해서 작가가 의도한 선과 악의 극단적인 상황설명 부분이, 프랑스 당시의 실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시대와 문화차이로 인하여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현실감의 부족은, 사실 소설의 이념전달의 목적을 기준으로 할 때, 치명적인 문제점으로 지적 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프랑스 당 시대의 어렵고 복잡했던 정치, 문화, 사회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독자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우리의 현실과 동 떨어진 사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이고 의미심장한 여러 상황설명이, 쉽게 공감을 일으킬 수 없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지만, 그러나 세계의 만인이 독자가 되는 현 상황하고는, 현격한 당시 문학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시간과 공간을 떠나 언제든지 공통의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철학적 글과 비교하여, 소설이 갖는 맹점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같은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소설과 글로발 시대의 현대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다른 점이 되는 것이다.

, 소설 « Les misérables », 이렇게 중요성 있는 주제와 병행하여 적절한 상황설정과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사고의  발전에 따르는 현대소설의 발전된 다양한 서술방법과 비교될 때는, 여전히 미숙한 면을 보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IV. 결론

              글의 결론에 이르러, 앞서의 분석과 평가에서 다루었듯이, 저자는 독자들이 시대의 프랑스 최고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 Les misérables » 마침내 옳게 이해하였으리라는 바람이다. 또한 나아가, 동안 혼란스럽기만 하였던, 예술의 장르로서의 소설문학의 정체성을, 역시 발견하였으면 하는 기대를 하여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 자체가 과학과 달리 초험적 대상으로서, 느끼고 경험하기에는 무척이나 다른 천부의 예술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감안하여 , 저자의 이러한 바람은 지나친 바람, 개인적 소망이라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예술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인류역사 이래 끊임없이 추구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인류가  예술을 추구하는 이러한 노력이, 바로 예술의 신비롭고 영원한, 불멸의 마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예술은 인류가 소원, 소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마력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타고난 인생의 고통과 고뇌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관점에서 살펴볼 있겠다.

, 인간이 살고 있는 현 세계, 표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법칙을 매체로 철저한 인과법칙 하에 존재하며, 인간 역시 이러한 세계에서 운명론적인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결과로서의 인간의 고통과 고뇌는 그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원인은, 바로, 채워지지 않는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근본 원인이 되는 인간의 욕망을 아예 제거, 소멸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해결방법은 사실 인간의 인식능력, 즉 정신의 발전, 고양을 통하여 가능케 되는 것이며, 실제로  이러한 노력은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세계와 성인이나 불자들에 의한 해탈(열반)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순수인식의 세계에서, 성인이나 불자들은 순수인식이 더욱 심화된 해탈(열반)의 세계, 즉 의지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히,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과법칙이 존재치 않는, 즉 인간의 고통과 고뇌가 존재치 않는, 태초 이전의 무의 세계, 의지의 세계, 즉 창조주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자신들을 창조한 모체인 창조주의 세계로 귀환하고자, 즉 자신들이 태어난 영원한 안식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류의 태고적부터의 본능적 노력이자, 고귀한 노력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류의 본능적이고 고귀한 노력에서 우리는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예술의 마력의 존재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과 수단의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예술의 정체성의 논리적 이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인류의 문화역사에 존재하여 온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세계를 한 번 경험하게 된 예술가는 일생을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예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 역시, 소설문학으로서의 예술의 한 장르임이 확연할 때,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인류의 영원한 고귀한 문화사업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저술활동과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병행하여, 작가와 독자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의 원죄, 즉 인간의 타고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인 행운도 동시에 누릴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예술작품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바로 빅토르 위고가 150여년 전 그의 대표작 « Les misérables » 통하여 추구하였던 노력이며, 또한 오늘날 한국의 우리 독자가 작품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얻을 있는 자부심과 행운이라 있을 것이다.



(1) :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 장발장 »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불어발음으로서, 불어 원어발음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 정발정 »으로 교정하였고, 또한 이 소설에서 다른 고유명사 불어발음도 이러한 의도에서 마찬가지로 조금씩 교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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