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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itut Schopenhauer de Pari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

   파리 쇼펜하우어 인문사회과학 연구회

 

 

 외국유학(프랑스 석,박사)의 의미와 가치에 관하여      

      ; 프랑스 교육, 문학, 기타 관련 글, 소논문 모음집

Quel sens et Quelle valeur donnés aux études en France(Master  et Doctorat) pour les étudiants coréens

 

 

     // 머 리 글 //

 

      한국에서 대학 2년을 마치고 프랑스에 첫발을 내디딘 지 어언 30여년이 지났다. 1985년 가을 프랑스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도착하여, 아는 분의 차를 타고 가면서, 트럭을 운전하는 노무자 차림의 잘 생긴 프랑스 사람을 보고 의아해(?) 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남다른 오랜 유학생활을 하였고, 또한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그간 본인은 이런 저런 이유에서 글을 쓰게 되었고 또한 책자도 출간하였다.

이번에, 몇 년전 저자의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 프랑스 대학에서의 석,박사 논문 쓰는 법에 관하여 »에 이어서 프랑스 관련 두 번째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 책자에서는 그 간의 본인의 글, 소논문들을 모아보았다.

프랑스를 수십 번을 오가면서도, 미국은 물론, 가까운 중국, 일본에도 가본 적이 없는 본인의 글은, 당연히 프랑스 관련된 글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이렇게, 이번 책자 « 외국유학(프랑스 석,박사)의 의미와 그 가치에 관하여 »는 그 동안의 본인의 프랑스 교육, 문학 기타관련 글들과 소논문으로 구성되었다.

특히나 여기서는, 책자 제목이 의미하듯이, 또한 30여년의 유학경험(교육학박사, 철학박사)을 가진 본인의 남다른 실전경험이 말해주듯이, 외국어 교육과 외국유학의 의미와 가치에 관하여 심심한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또한 본인의 30년 유학생활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본인 유학생활의 노하우, 즉 석, 박사 공부의 본질에 관하여 피력하였다.

단편적인 많지 않은 양의 글이지만, 그동안 피상적이기만 하였던 석,박사 공부의 목적,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 또한 나아가 석, 박사 공부의 본질을 여러분은 여기서 여실히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첫 파트에서의 첫 번째 글인 "외국어 교육의 진실과 거짓"에서 본인은, 외국유학에 앞서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의 외국어 교육의 심각한 상황을 기술하였으며, 또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 오늘날 한국의 외국어 교육의 현실은 위기의 상황을 지나 참으로 암담하고 웃지 못 할 상황임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외국어 중, 같은 동양 언어가 아닌, 영어, 불어, 독일어 등의 서양언어의 교육은 더욱 더 심각하며, 아예 그 교육목적 자체가 혼돈과 착각의 늪에 빠져 있음을 살필 수 있다

« 결국, 한국인으로서의 영어의 언어벽이 이렇게 심각할 때, 현 한국의 영어교육의 혼돈과 착각의 파행적 현실은 이러한 영어 언어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왜곡에서 기인된 것이며, 이렇게 잘못 된 영어에 대한 이해가 영어교육의 비효율성, 급기야는 오늘날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물불가리지 않는 무목적의 영어교육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현 외국어 교육의 위기상황 해결의 진지한 노력은, 우선적으로 한국인의 영어 언어벽 극복의 불가능성을 인정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영어벽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차 후 초, 중등, 대학교육에서 가능한 영어 학습수준을 정확히 파악, 조정함으로써, 문제해결의 효율적 외국어 교육정책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유학(프랑스 석,박사)의 의미와 그 가치에 관하여"의 글에서는, 외국유학, ,박사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힘으로써, 결국 그 본질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 기실, ,박사 공부의 목적은 미래의 연구자의 준비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 박사 공부를 마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면은 이제 학위 당사자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한사람의 학자로서 본격적인 연구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연구원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박사 과정은 일종의 연구원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고 또한 수련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은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박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 하는 것은 연구결과가 아닌, 연구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또한 학자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연구능력을 습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 대학에서의) ,박사 논문 쓰는 법에 관하여"의 글은 본인의 앞서 언급한 저서의 중요내용을 발췌한 것으로서, 한국이든 프랑스이든, ,박사 논문을 쓰는데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을 간추려 적어보았다.

« 학문에 대한 수많은 의미와 해석을 차치하고, 저자의 학문에 대한 정의는, 우주, 자연, 전세계를 창조하고 존재케 하는 알 수 없는 힘, 즉 세계의 « 통일성(統一性) ; Unity, Unité »을 그 우선적 전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의 « 통일성 »은 노장사상에 있어서의 도()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 이렇게,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 자연, 전세계는 이러한 도의 구현이며, 또한 도의 구성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는 우주, 자연의 모든 존재물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우주, 자연, 전 삼라만상 존재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세계의 « 통일성 », 즉 삼라만상 존재의 필요충분조건에 관련된 것을 연구하는 것이 학문이며, 바로 이 « 통일성 »이 우주, 자연, 삼라만상의 전세계를 학문의 대상으로 할 수 있게끔 하는 실체,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변하는 본질로서의 실체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학문의 불변하는 « 보편타당성 »의 가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학문의 연구결과는 세계의 « 통일성 »의 결과(자체)로서,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일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그 결과가 귀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 외의 교육관련 글들은 대부분이 본인이 90년대 말, 2000년 초반에 «한국 대학교육 협의회»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연구활동의 결과인 소논문들이라 하겠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외국박사로서는 미국, 일본 유학생 출신의 박사들이 주를 이루었던 시절로, 연구활동, 연구논문도 미국과 일본 관련 위주의 글, 논문들 일색이었었다. 이렇게 당시에 미국, 일본 박사, 그리고 국내 박사 연구원들과 한 팀이 되어, 프랑스를 포함한 외국의 고등교육들과 관련하여, 비교, 분석하며 한국의 고등교육의 실태, 문제점, 그리고 개선방안들에 관한 연구에 몰입하였던 기억들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떠올려 지고 있다.

특히, " 프랑스 고등교육 기관평가에 대한 비교연구(프랑스 CNE 평가를 한국 대학교육 협의회 평가와 비교하여)" 의 글은, 본인이 근무하였던, 한국 대학교육의 평가기관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대학교육 협의회의 평가업무를 프랑스 고등교육 평가기관인 CNE(Comité nationale d'évaluation ; 국립 평가위원회)의 평가 업무과 비교, 분석한 글로써 상이한 환경의 양기관의 장, 단점과 문제점을 비교, 분석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 프랑스나 한국을 막론하고, 세계화, 정보화의 시대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더 이상, 통제와 감독을 기반으로 하여 대학을 지도, 발전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율을 바탕으로 한 지방 분권적, 특성적 발전 여건을 각 대학에 마련하여 주는데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언급하였듯이 오늘날의 경제, 사회의 변화, 발전은 더 이상 과거의 정부 주도하의 통제, 감독의 획일적 교육정책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 고등교육 기관평가에 있어, 각 나라에 따르는 여러 특성은, 결국은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교육구조를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서 각 나라마다 미흡한 조건과 특수한 사정에 따라 교육구조의 각 구성 요소들의 적절한 배합의 결과라 하겠다.

따라서, 현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서는,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교육구조에서의 수정, 보완이 불가피 하다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수정, 보완의 문제는 결국 앞서 설명한 신 생산구조인 Post-fordism의 특성에 비하는 교육분야에서의 원칙적, 이상적 구조에서의 수정, 보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 분권적 교육체제, 그리고 유연성 등에서의 수정, 보완책인 정부, 중앙의 규제와 통제, 감독이 필요시 되며, 결국 이렇게 정부, 비 정부 기관에서의 평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각 나라의 고등교육 기관 평가체제는, 각 나라의 그리고 민족적 특성과 사회의 변화, 발전상태 하에서 발생되는 원칙적이고 이상적 교육구조를 위한 노력의 현 좌표라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 하에, 프랑스는 정부기관, 하지만 대통령 직속 평가기관에 의한 평가가 행하여지며, 평가결과는 전혀 서열화 및 차등적 (재정)지원의 기준이 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며, 이에 비교하여, 한국의 경우는 교육부에 의한 차등적 재정지원과 병행하여 차별화, 서열화를 통한 정부의 일방적 규제와 감독을 초래하는 기관평가가 주목되고 있다 하겠다.

결국, 원칙적, 이상적 평가, 기관평가 체제는 존재할 수 없다 하겠다. 단지, 얼마나 이러한 원칙적, 이상적 평가구조, 체제 그리고 필요요소를 구비하였으며, 또한 그 필요조건을 만족하냐로 한 나라의 평가체제의 우열은 구분된다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요소와 필요조건의 적절한 배합을 통하여 결국에는 원칙적, 이상적 평가체제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여러 변수의 배합을 통한 평가체제는 또한 평가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한 나라의 총체적 교육, 아니 전체적 사회, 경제의 발달과 변화 속에 또 다시 수많은 변수를 갖으며 변화,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이러한 평가체제와 평가활동은 이제는 더 이상 외부 변수로서의 역할 담당이 아닌 교육의 내부의 자체발전의 한 중요 요소로서 대학 경영의 실질적인 한 과정으로 정착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 파트, 프랑스 문학관련 글에서는 특히, 지금은 그만 두었지만, 과거 본인의 세 번째 프랑스 박사, 불문학 박사의 논문주제였던 위고의 작품 레미제라블을, 마지막 파트에서 기술한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을 근거로 하여 중요성을 두고 작품분석 하였다.

« 문학작품을 논할 때, 예술성을 배제하고는 그 결론에 이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문학을 예술이 아닌 타 분야의 시각으로, 즉 과학 또는 철학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은, 시적 용어의 사용과 그리고 스토리를 전개하여야만 하는 문학작품의 특성으로 인하여,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고 또한 철학적 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은 문학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예술적 대상을 표현함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이 외의 타 목적을 갖게 되면 그 평가와 분석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은 결국 예술성을 그 근원으로 하게 되는 것이며, 예술성의 존재여부, 나아가 예술성의 깊이 정도로 그 문학작품의 수준을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예술성을 표현하는 학문이며, 소설 역시 문학의 한 장르로서 예술성을 띠게 되는 것이며, 예술적 대상을 표현함을 그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 결국, 소설 전반에서 우리가 느끼듯이, 그리고 위의 여러 예문에서 분석, 확인하였듯이, 소설 « Les misérables »의 작가는, « 소설가는 일련의 내용전개, 즉 스토리를 전개하여 나감으로써, 소설을 읽는 감상자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이념을 최종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용전개가 가능한 적절한 인간의 성격을 선정하여 정확하고 깊이 있게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묘사된 성격을 절박한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더욱 더 의미심장한 상황 하에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소설을 읽는 감상자는 소설가가 원하는 이념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소설가 본연의 임무를 다 하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겠다

«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 역시, 소설문학으로서의 예술의 한 장르임이 확연할 때,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인류의 영원한 고귀한 정신 문화사업에 참여한다는 뜻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병행하여, 결국 작가와 독자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의 원죄, 즉 인간의 타고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인 행운도 동시에 누릴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예술작품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바로 빅토르 위고가 150여 년 전 그의 대표작 « Les misérables »을 통하여 추구하였던 노력이며, 또한 오늘날 한국의 우리 독자가 이 작품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 있는 자부심과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상기의 레미제라블 작품분석은 쇼펜하우어 철학, 예술론을 실질적으로 적용한 내용이라 하겠다. 본인의 두 번째 프랑스 박사, 철학박사에서 쇼펜하우어를 전공한 본인은, 그 이론의 응용결과를 실제로 프랑스 문호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 이 작품분석에서, 본인이 원했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쇼펜하우어의 철학, 특히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의 정수를 새삼 확인하여 볼 수 있었던 경우였었다고 하겠다.

« 이러한 예술의 마력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타고난 인생의 고통과 고뇌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 인간이 살고 있는 현 세계, 표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법칙을 매체로 철저한 인과법칙 하에 존재하며, 인간 역시 이러한 세계에서 운명론적인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결과로서의 인간의 고통과 고뇌는 그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원인은, 바로, 채워지지 않는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근본 원인이 되는 인간의 욕망을 아예 제거, 소멸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해결방법은 사실 인간의 인식능력, 즉 정신의 발전, 고양을 통하여 가능케 되는 것이며, 실제로 이러한 노력은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세계와 성인이나 불자들에 의한 해탈(열반)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순수인식의 세계에서, 성인이나 불자들은 순수인식이 더욱 심화된 해탈(열반)의 세계, 즉 의지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히,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인과법칙이 존재치 않는, 즉 인간의 고통과 고뇌가 존재치 않는, 태초 이전의 무의 세계, 의지의 세계, 즉 창조주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자신들을 창조한 모체인 창조주의 세계로 귀환하고자, 즉 자신들이 태어난 영원한 안식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류의 태곳적부터의 본능적 노력이자 고귀한 노력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류의 본능적이고 고귀한 노력에서 우리는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예술의 마력의 존재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과 수단의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예술의 정체성의 논리적 이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인류의 문화역사에 존재하여 온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세계를 한 번 경험하게 된 예술가는 일생을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예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

 

       세 번째, 마지막 파트에서는 프랑스와 직,간접으로 관련있는, 또는 본인이 중요하다 생각되는 글들을 실어보았다. 이 글중 "쇼펜하우어의 철학세계", "쇼펜하우어의 예술의 세계"는 이 책자 전반에 흐르는 본인의 사상을 대표하는 글이라 하겠다.

« 쇼펜하우어의 철학세계는 인간의 고뇌문제에 안착하게 되는데, 인간의 욕망을 인간고뇌의 근원적 원인으로, 그리고 인간의 인식을 이 고뇌의 해결방법으로 제시하게 된다.

, 표상의 세계에서의 인간이 자기 인식의 발전과 함께, 예술의 세계를 거쳐 해탈의 세계 즉, 고통과 고뇌가 존재치 않는 출발지인 의지의 세계로 돌아옴으로써, 인간의 고뇌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대의지는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두 세계를 넘나드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인식능력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능력을 소유한 인간은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 인간자신을 예술의 세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며, 결국 대의지 자신은 객관화, 개별화를 거쳐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통하여, 즉 자신을 비추어 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쇼펜하우어 철학세계는 두 세계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면서, 또한 대의지 자신을 비추어 주는 거울인 되어버린 인간의 순수인식을 인간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여기서 인간은 수많은 이데아의 하찮은 한 결과물이지만, 그리고 우주, 자연의 미미한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서는 안 될 한 점,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의미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무조건 고상하고 멋있는 나라라는 생각에, 30여년 전에 무조건 이 곳 프랑스에 유학을 온 본인은, 그 동안의 많은 허황되고 왜곡된 당시의 생각들을 뒤로하고, 이제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본인의 편안한 마음은, 얼마전 한국 신문에서 소식을 듣게 되었던 황필상씨, 황옹()(7년이 넘게 끈, 장학사업 재단 증여세 관련 소송에서 대법원 승소 후의, 그 간의 힘들었던 심정을 " 400년 도사 "의 심정으로 표현하였던 황필상씨는, 일찍이 80년 초 국비 장학생 프랑스 공학박사 유학생 출신이며, 개인적으로는 본인의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선배로서, 과거 아주대 재학 시절에도 그만의 개성 있는 성격과 외모, 그리고 또한 만학도의 나이로 인하여 황옹이라 호칭되었다)의 마음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또한 황옹 도사님이 추구하는 500(이제 다시 기회가 왔으니 500살이 되도록 장학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도사다운 포부"를 대법원 승소 후 밝혔다.)은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이 곳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 관련 글, 책자를 써 볼 생각이다.

이렇게, 그 동안 미흡했던 글들을 보충하고 또한 새롭게 글을 써 보면서, 좀 더 도움 되는 좋을 글로서, 프랑스 문화를 애호하는 독자 여러분들과 지금의 편안한 마음과 함께 계속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7 4 10

                                                                                       파리에서, 저자 김 성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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